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태에 빠진 자운 아가씨는 긴 한숨을 또 한 번 내쉬면서, 하는 수 없이 언덕 아래

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.복면을 한 사나이는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아가씨의 날

씬한 허리, 팡파짐한 둔부, 하느적하느적 움직이는 두 다리 – 그림 같은 뒷모양을

묵묵히 바라다보고 있다가 별안간 실성한 사람같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고함을

질렀다.”와아아아! 하하하하‥‥‥‥”웃음소리인지 울부짖는 소리인지 분간키 어려운

처절한 고함 소리였다.한바탕 목청이 터져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니, 여태까지 몸

속에 감돌고 있던 불가사의한 힘이 일시에 폭삭 꺼져 버렸다.전신이 흐늘흐늘, 당

장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.그는 자리를 떠 보

려고 했다. 그러나 사지가 솜 조각같이 힘이 없고 말을 듣지 않았다. 밤바람이 한바

탕 모질게 불어 왔다. 얼음장같이 싸늘한 독기는 더한층 맹렬한 기세로 전신에 침

투해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.하는 수 없이 그는 두 눈을 감았다.죽음의 신(神)이 찾

아와서 부를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다.얼마 남지 않은 어슴푸레

한 달빛이 언덕 위를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.공포에 싸인 처량한 밤.바로 이 찰나에

, 언덕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한줄기 사람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날아들었다.

그 사람의 그림자는 서슴지 않고 언덕 위에 올라서서 몸을 약간 흔들흔들했다. 왼

손으로 자기 가슴 한복판을 문지르고 있었다.오른손을 소맷자락 속으로 옴츠러뜨

리고 있는 그 사람의 그림자.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몸에 부상을 입고 이 자리에서

사라져 버렸던 일견사 허비였다.허비는 복면을 한 사나이가 쭈그리고 자빠져 있는

신변 가까이 걸어갔다. 만면에 살기가 등등했다.징글맞은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나

서 혼자 중얼댔다.”우후후흥! 천둥 벌거숭이같이 까불더니, 알고 보니 정말 쓸모 없

는 녀석이었구나! 헤헤헤!”그의 콩알만한 조그만 눈동자는 매서운 광채를 발산하

면서 사방을 비로 쓸 듯이 단숨에 훑어봤다.또다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복면을

한 사나이에게 꽂혔다.선뜻 상반신을 꾸부렸다. 손을 뻗쳐서 복면을 한 사나이의

몸을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모조리 뒤졌다.뭣인가 그의 손끝에 스치는 물건이 있었다

. 그의 얼굴에는 당장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.너털웃음을 쳤다.”헛! 헛! 헛! 그러

면 그렇지! 내 추측이 틀림 있을라구! 하마터면 이놈을 그냥 놓쳐 버리고 허탕을 칠

뻔했구나! 헤헤헤!”그는 손가락으로 복면한 사나이의 의복을 북 그어서 찢어 버렸다.

그리고 막 손을 뻗쳐서 복면한 사나이의 품속으로부터 그 물건을 움켜내려고 하는

찰나였다.별안간, 간드러진 여자의 웃음소리가 그의 등덜미에서 들려 왔다.”호호호!

이봐요! 허비 노인!